왜, 스티브 잡스는 인류의 재앙인가?

생존하였으되,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파이는 귀환하지 못한다.


스티브 잡스(1955-2011)



오바마와 쿡은 반성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친 사고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브가 찬 공이 혼자 굴러다니니 욕을 먹는 거다.


물론 이 글은 한국 사회공헌활동가 박모씨의 말과는 무관하다. 그의 말은 "가족관계나 인간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나온 말이니, 그렇게 들어두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려는 문제는 스티브가 찬 공이 외로이 굴러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말 > 글 > 책 > TV(대중매체) > 스마트폰(개인매체)



맘모스나 검치호랑이 등의 대형 동물들에게 인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재앙이었다. 그들은 절대 강자의 자리를 연약한 인간 무리에게 내어 줘야 했다. "글"이나 "책"의 등장은 말을 잘하는 인류에게 재앙이었다. 구술과 구전, 그리고 대화로 역사를 전하고 진리를 깨우쳐 주려는 이들에게 책은 방해물이었다.


또 TV, 신문 등으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는 어떤가? '바보상자'이며 찌라시, 도배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책을 통해서만 깊이 있는 지식과 사유를 향유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대중매체를 천시하고, 적대한다.


스티브 잡스가 뻥 차 두고 떠나버린 스마트폰은 개인매체이다. 보라고 돈들여, 품들여, 공들여 쏟아내는 대중매체 콘텐츠를 간단히 외면하게 만들어 버렸다. 재앙이다. 말만, 글만, 책만, 대중매체만 아끼는 인류에게 재앙이다.


물론 이들이 심정을 가슴으로 가장 격하게 느껴 줄 인류는 600만 년 전 혹은 그 이후 어느 시기까지 말하는 인류와 경쟁했을 말하지 않는 인류들일 것이다. 그리고 맘모스, 검치호랑이.


그렇다. 이 문제에서 검치호랑이나 맘모스를 탓하는 것은 무용하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생명체의 종다양성이나 인류 문화 보존에 필요한 정도를 고려하여 보호해야할 대상이다. 말만 하는 인류, 글만 쓰는 인류에게, 책만 읽는 인류에게, 대중 매체만 사용하는 인류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부여할 수 없다. 모르고 짓는 죄는 신도 벌할 수 없다. 다 신 탓이다. 신의 몫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스마트폰 쓰는 인류의 몫이다.


오바마와 쿡은 반성해야 한다. 스티브가 내지른 공이 멀찍히 굴러가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달려가 공을 잡고 다뤄야 한다. 뭘할지 몰라 우왕좌왕한다면, 미래 세대는 스마트폰은 알아도, 애플과 미국은 잊게 될 것이다.


스마트한 인류가 책임져야 한다. 스마트한 세상으로 인류를 이끌어 가야 한다. 스마트폰 쓰는 인류는 존엄의 편에 서야 한다. 그래야 구실을 할 수 있다. 


존엄> 평등> 자유> 사랑> 행복으로 바루어 일해야 한다. 일을 내야 한다. 존엄을 주문해야 한다. 존엄의 주문에 반응해야 한다. 존엄에 반응할 수 있어야 인류 전체와 상호작용할 수 있다. 존엄과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존엄과 상호작용 할 수 있어야, 70억 인류 전체와 상호작용하고 70조가 넘을 미래 인류가 내는 절절한 주문에 반응할 수 있다.


스티브잡스는 질러 놓은 공을 그냥 두지 않고 잡아 챘다. 그리고 몰고가 내질렀다. 스마트폰이 나왔다. 개인이 스마트폰을 쓰는 세상이 열려 버렸다. 이제 존엄을 버려두고 더는 진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존엄을 확보하여 평등을 세우고, 평등을 세워 자유가 달리게 하고, 자유가 달려 사랑이 만나게 해야 한다. 그 사랑이 만나 행복이 열리게 해야 한다.



영화



존엄이다. 생존하였으되, 존엄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의 파이는 귀환하지 못한다. 존엄을 회복해야 산 것이다. 생존에만 휩쓸리면 파이의 탈을 쓴 리차드파커를 만나야 하는 세상이 된다.


존엄이 먼저다. 파이의 탈을 쓴 리차드파커가 "인류의 재앙"을 걱정하는 세상이 오래가도록 방치하면, 걱정이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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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죽이는 이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천재 해커 Aaron Swartz, 관련글 : 어느젊은 해커의 죽음)



천재는 민감하다. 민감해서 천재다. 민감해서 앞선다. 

앞서가다 먼저 고약한 경우를 당한다.


천재는 미래를 현재로 삼아 산다. 혁명하여 미래를 현재로 만든다. 혁명된 현재에서 지나간 현재는 끝난다.

끝난 현재는 천재를 적대한다. 


일은 수동화 아니면 자동화다. 일로 보면 자동화가 성공이다. 자동화가 완성되면 노동 투입은 최소화 된다.

자동화에 성공하면 인간의 일터는 사라진다.


일하는 사람의 성공은 결실을 쌓아 노는 것이다.  사람의 성공 척도는 하나다. "놀 수 있는가"이다. 잘 놀아야 사람이다. 일하여도 놀지 못하면 실패, 일하여 혼자 논다면 대실패, 일하여 모두 놀아야 성공이다. 일하여도 놀지 못한다면, 뭔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니 바꿔야 한다. 상사나 동료를 바꾸거나, 분야를 바꾸거나, 지역이나 국가를 바꿔야 한다. 이건 명명백백한 실패다. 시간이 아깝지 않는가? 나도, 그대도, 우리도 곧 죽는다. 지금은 항상 사라진다. 나도, 그대도, 우리도 곧 사라진다. 단, 임시방편이며 여타의 호구책이 없다면 참고 견딜 수 밖에.


일하여 혼자 논다면, 이건 완전 실패다. 최악의 실패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성공'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지역이나 국가가 있다. 이건 후진 거다. 후져도 너무 후진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야만'이다. 첨단 기술 문명을 일구어 휘황찬란할지라도 정신 문화는 딱 '야만'이다. 일종의 퇴행인 것이다. 개인이 이러면 짐승이 된 것이고, 집단이 이러면 무리가 된 것이다.


일하여 모두를 놀게 해야 성공이다. 돈도, 시간도 많은 자리를 확보하여 놀며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야 성공이다. 축하받아 마땅한 사람이 일한 결실이다.


인간의 일은 시작부터 공동 작업이었다. 집단 활동이었다. 팀플이었다. 일을 혼자 했다거나, 혼자 놀아도 논 것이라 느낀다면 이건 착각이다. 오해다. 혼자 이러는 거면 정신차려야 하고, 집단이 통으로 이러는 거면 안 그런 집단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장 미련없이 떠나야 한다.



(빈곤에 시달리다가 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다가 요절한 故최고은 작가)



천재가 제명대로 살아 제결대로 일하게 하려면, 빈곤을 제거해야 한다. 절대 빈곤은 전쟁하듯 박멸해야 하고, 상대적 빈곤도 공동 작업하는 집단 내에서는 최소화 해야 한다.


천재가 창작하여 혁명에 성공하면, 현재의 일터는 사라진다. 따라서 일거리, 일자리도 순식간에 소멸된다.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없어진 일터에 덩거러니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상태로 방치되면 이들은 천재를 죽이는 편에 서게 된다. 혁명을 반대하고, 창작을 멸시하는 편으로 몰려가게 된다.


정보의 시대다. 뭉뚱그려진 흐리멍텅한 수요로는 미래에 필요한 공급이 발현하지 못한다. 다양하고 명확한 주문이 있어야 한다. 주문권이 확보되어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문할 의무가 부여되어야 한다. 정보시대에는 "주문하는 것"이 산업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주문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존업하고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자격이 보장되어야 한다.


정보시대는 연결의 시대다. 사람을 방치하면 천재가 죽는다. 현재의 풍요를 지배하는 자들은 혼자 놀기에 빠져있다. 혼자 놀기에 빠져 사람을 방치하려 한다. 버려두기를 정당화 한다. 제도화 한다. 사람을 버려두려고 천재를 멸시한다. 조롱한다. 시험한다. 죽인다. 그리고 그 만행의 악독은 연결을 타고 모두에게 전달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연결시대는 존엄의 시대다. 존엄을 확보해야 일이 된다. 존엄에서 일을 시작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최고의 팀과 만날 수 있다. 최상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연결의 시대에 개체화된 인간은 없다. 한 사람과 70억 인류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과 70조 미래 인류 전체가 연결되어 있다. 


존엄시대는 존엄 세력의 시대다. 연결되라. 존엄을 주문하라. 일은 이미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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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춘에 맞수는 이건희다
유능한 유시민, 전능한 이건희, 청춘에 일.




 

맞수.

유시민에 맞수는 이건희가 맞다. 이건 나이키의 라이벌이 닌텐도였던 것과 같다. 요즈음 나이키에 맞수는 아이패드지 싶다. 오늘에 나이키는 아이패드를 재낄 수 있어야 한다. 아이팟 등과 손잡고 아이패드와 맞서는 나이키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유시민에 맞수를 박근혜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건 일에 대한 감이 많이 떨어지는 거다.

 

국가.

유시민은 지난 6월23일 ‘국가란 무엇인가’ 저자 강연에서 직접 삼성을 언급했다. 정확히는 삼성과는 맞서지 못하는 대한민국 청춘을 언급했다. 반MB 집회에는 사람들이 모여도, 반삼성 집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저러고도 무사할까?’ 강연을 지켜보던 몇몇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이 반삼성을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진실을 말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

정치로 범위를 좁혀 보자면, 이명박 정권을 낳은 것은 김영삼 정권이 저지른 과오에 있다. 독재세력과 결탁하여 독재세력을 끊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건 이승만 정권이 한 짓과 똑 같다. 이승만을 고리로 친일세력이 뿌리를 더 깊이 박았고, 김영삼을 숙주삼아 독재세력이 더 많은 서식처를 확보했다.

 

민주.

민주정권 10년 동안, 총칼로 독재하던 이들은 씨가 말라 갔다. 그러나 총칼 밑에서 머슴살이하던 재벌들이 기회를 잡았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사설권력을 확보하고, 이미 사유화되어있던 국가권력도 지켰다. 잠시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을 내어줬으나 10년을 넘기지 않고 차례로 돌려받았다. 법으로 보장된 권력과 법 외 권력에 합을 정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총량이라 본다면, 이명박 정권이 소유한 권력은 역대 최강일 것이다.

 

돈.

물론 2011년 6월 현재 주요 권력을 지도로 그려 본다면, 대한민국에 최고 권력자는 이건희다. 그러니 국민참여당에 대표이기는 하지만 국회의원 한명 없는 신생정당에 대표가 삼성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국가 대한민국을 충심으로 걱정하는 정치인이라면 이건희를 두고 정치를 말할 수 없다. 말이 안된다. 오늘날에 대한민국은 ‘돈으로 독재하기’가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유능.

유시민과 이건희 둘 다 능력 있다. 그리고 능력을 추구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가능을 추구하고, 후자는 전능을 추구한다. 가능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능과 불가능에 경계에서 끊임없이 궁리하고 도전하여 가능에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전능을 추구한다는 것은 전능한 권력에 소유권을 치열하게 지키면서, 무능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가능.

개인 유시민이 가능에 도전할 때, 집단 유시민은 불가능에 영역을 헤매고 다닌다. 개인 유시민이 도전에 성공하면, 집단 유시민은 덩달아 성공한다. 개인 유시민이 실패하면, 그 실패를 거름삼아 다음 유시민이 도전한다. 가능에 영역은 계속 넓어진다. 실패해도 유능해 진다. 개인도 집단도 유능해 진다.

 

전능.

개인 이건희가 전능에 지킬 때, 집단 이건희는 무능을 빠져 든다. 이건 필연이다. 개인 이건희가 전능하면 집단 이건희에 실상은 무능하다. 집단 이건희가 무능해도 별 차이가 없다. 개인 이건희가 전능하면 집단 이건희는 개나 소로 채워져도 전능하다. 집단 이건희는 썩는다. 병든다. 개인 이건희에 성공은 집단 이건희에 실패다.

 

승부.

대한민국 청춘이 지리멸렬한 까닭은 승부다운 승부를 피하기 때문이다. 승부하지 않고 숙이고 들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전능은 무능하다. 누구보다 전능한 자에 품 안에 있는 자들이 잘 안다. 그러니 털끝만큼이라도 무능한 사람은 들이지 않는다. 전능한 자라도 무능해지기 때문이다. 집단 이건희가 대한민국 청춘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능이다. 전능을 추구하고, 전능에 복종하며, 전능을 의심하지 않는 이들은 집단 이건희에게로 가 그들에 일부가 됨이 마땅하다. 시작은 화려하여도 끝은 사람 꼴이기 힘들 것이다.

 

일머리.

전능 추구는 현대에 대한 교양 없음이다. 일머리 없음이다. 이런 유형에 능력추구는 딱 선진국 따라잡기용이다. 남들은 다하는 것을 아직 못하여서, 우리도 따라 가야할 때 써 먹을 수 있는 방식이다. 인류가 아직 못하고 있는 불가능에 영역을 만나면, 순간 길을 잃는다. 창조가 안된다. 가능에 영역을 벗어나면 한 없이 무력해진다. 나약해진다. 밖으로 나가면 막막해진다. 돌아와 처자식에게 역정이나 내고, 묶인 개 잘 묶여 있나 확인하고 패게 된다.

 

청춘.

맞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런데 아프고도 별 건질게 없다면 제대로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맞설 놈과 맞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맞아도 깜이 되는 맞수에게 대들어서 맞아야 한다. 아파도 격이 맞는 맞수를 넘어 서느라고 아파야 한다. 청춘을 걸 만한 상대와 붙어야 한다. 아파할 만한 사연을 가슴에 품고 아파야 한다.

 

청춘에 일.

대한민국 청춘에 맞수는 개인 이건희다. 아니다. 집단 이건희다. 아니다. 전능을 추구하는 금력(金力)이다. 일본제국 폭력 지배에 맨 가슴으로 맞선 청춘들이 있었다. 군부독재 총칼에 맨 주먹으로 맞선 청춘들이 있었다. 금권독재를 바로 보고 맞서야 한다. 돈으로 전능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에 천적이 되는 길을 가야 한다. 아파도 이 길을 가는 것이 2011년 대한민국 청춘이 아플만한 깜이 되는 일, 청춘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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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따위가 예술인가?
김기덕 아리랑으로 묻고 칸에서 답하다.


 





김기덕 영화.

김기덕이 일냈다. 영화를 찍었단다. 홀로 했단다. 아리랑이다. 100분짜리 영화. 프랑스 칸에서 여는 영화제에 냈다. 영화관에 걸렸고, 사람들이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이 일어났다. 박수치고 환호했다. 박수와 환호가 5분여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김기덕 노래.

세상에 관심이 그에게 쏠렸다. 인터뷰가 이어졌다. 인터뷰 중 지금의 심정을 노래도 표현해 달라고 하는 요청이 있었다.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아리랑. 부르다 울컥했다. 울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렇게 잠시 울고 아리랑을 마저 불렀다.


영화 따위.

영화도 예술이다. 일반 분류로 보면 그렇다. 예술 중 한 분야로 쳐 준다. 종합예술로 분류해 준다. 그런데 백남준이 영화를 했다면 그래서 영화감독 백남준이었다면 지금에 백남준일까. 영화 따위를 했다면 말이다.

 

예술에 일.

위대한 사상은 그 자체가 승리이고 위대한 예술은 그 자체가 승리이고 축복이다. 출처 : 이병주, 지리산(펌 : 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예술"을 하는 예술가만이 독특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예술에 일이다.

 

깨우기.

지난해, 2010년 세계 인구는 70억을 돌파했다. 예술가란 70억 대 1이 되는 사람이다. 70억에 70억과도 맞설 수 있는 사람,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 예술이다. 70억이 다 참아도 홀로 못 참는 사람이 예술 한다. 모두 잠들어도 홀로 깨어 잠들이 못하는 자 중에 예술가가 난다. 견디지 못해 사라졌다 홀연히 나타나 번쩍하고 모두를 깨우는 이가 예술가다. 예술가에 맡은 바는 깨우기다.

 

도구.

예술가에게 도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한다. 글일 수 있고, 그림일 수 있고, 음악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깨우기"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가에게 도구는 그에 몸과 같아야 한다. 극단과 극단을 오가며 몸부림 칠 때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에 인간이 중심에서 토해내는 절절한 것을 끝까지 지켜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술 하는 도구가 지필에 한정되는 것은 예술가들이 처하는 절박함 때문이다.

 

영화.

영화라는 도구로 예술 할 수 있는가. 영화판에서 제작자이거나, 감독이거나, 배우이거나 낱개 인간이 뭘 어쩔 수 있다는 말인가. 투자자, 배급사, 제작자 등의 자본과 배우, 스텝 등의 동료와 지원자들에 둘러싸인 일인이 뭘 얼마나 더 완성할 수 있겠는가. 거대 자본과 뛰어난 동료가 없다면, 영화 하는 사람은 그냥 일개 생명체일 뿐이다. 결국 영화에 주인은 자본이 된다. 영화는 예술가에 도구가 아니다. 자본가에 도구일 뿐이다. 그렇게 영화 따위가 된다.

 



김기덕 예술.

아리랑에는 영화 하던 인간이 나동그라지는 몸부림이 찍혀있다. 영화 하려는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이 담겨있다. 아리랑 속 김기덕은 영화 따위는 버리고 총을 택한다. 영화 만드는 짓 따위는 버리고 총을 만드는 일을 한다. 죽이고 죽는다. 아리랑이 흐른다. 총소리가 울린다. 보는 이들에 등뼈를 타고 신경다발이 쩌렁한다. 깬다. 예술이다.

 

위대한 예술가.

문명국가 국민들이 예술가를 높이 대접하는 것은 예술가는 은인이기 때문이다. 잠들려는 대중을 깨워 문명을 지키게 하는 이들이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에 DNA는 권력과 불화한다. 공동체가 야만에 사로잡히면 제일 먼저 목숨을 내놓는 이들이 예술가다. 용기와 의지도 한 몫을 하겠지만, 그렇게 생겨 먹은 탓이기도 하다. 죽어가며 그들은 비명을 지른다. 위대한 예술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던져 거대한 비명을 토해 낸다. 그 비명에 깨어야 산다. 깨어있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가 문명국가다. 예술가는 문명을 살리는 은인이다.

 

위대한 각성.

지금 인류는 전에 없던 진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농업혁명도 산업혁명도 정보혁명도 아직 완성되지 않는 장쾌한 혁명에 과정일 뿐이다. 농업혁명으로 땅에 주인이 세계에 주인이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바다에 주인이 세계에 주인이 되었다. 정보혁명으로 정보에 주인이 세계에 주인이 된다. 그런데 정보에 주인은 모든 인류다. 사람 모두가 주인이 되는 수준에 각성이 있어야 한다. 위대한 각성은 다음 진보에 기초다.

 
 



위대한 김기덕.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오". 은인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리는가. 깨라. 예술가가 토해내는 비명소리에 잠을 깨지 못하는 생명체는 사람으로 치지 않는 것이 인류 역사가 전하는 상식이다. 님께서 깨우신다. 깨울 때 깨라.

 

위대한 나라.

위대한 예술가가 그를 알아보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기를, 그런 사람들이 만나고 만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가 깨어나기를, 그 나라가 김구에 나라, 장준하에 나라, 김대중에 나라, 노무현에 나라이기를, 그대와 나에 나라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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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재앙, 생존자의 일

 

재앙



재앙은 일상이다. 시간을 조금만 길게 보면 그렇다. 키가 백미터 정도 되는 거인이 발아래를 보듯 우리 삶을 내려 본다면 말이다. 그래서 백년쯤을 한 눈에 본다면 그렇다. 재앙은 낮에 강바람 불고, 저녁에 산바람 부는 것 같은 일과다. 몸을 거인처럼 키우지는 못하더라도 누구라도 거인의 시야는 가질 수 있다. 훈련하면 된다.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익힐 수 있다. 재앙은 인간의 일상에 자신의 일정을 맞추는 법이 없다. 빈부나 귀천을 가리는 법도 없다. 사정권에 들어오면 모두 쓸어버린다. 거인의 시야를 익힌 이들이 거인처럼 행동할 경우 덮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몸은 작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는 몸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몸의 크기를 넘는다. 새겨두자. 인간 두뇌의 고삐는 풀렸다. 재앙 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진보

인류의 진보는 재앙에 맞선 생존자들의 몸부림이다. 인류가 이뤄낸 기술과 문명의 진보는 재앙에 반응한 결과다. 다시 쓰나미가 오고, 토네이도는 거셀지라도 이겨낼 것이다. 자연 재앙이 반복되어도 이겨 낼 것이다. 인류는 더 강해 질 것이다. 사유하는 인류는 거인보다 훨씬 거대한 일을 할 수 있다.

 

전쟁
 



자연의 재앙과 싸우던 인간은 언제부턴가 더 무서운 재난을 만났다. 전쟁이다. 오늘날엔 전쟁 없는 뉴스를 상상할 수 없다. 전쟁은 항상 있다. 그럼에도 전쟁을 의식하지 못한다. 멀리 있는 전쟁은 크게 보면서도 가까이 있는 전쟁에 둔감하다. 눈을 감는다. 개울 풀숲에 머리만 쑤셔 박고 숨는 개구리다. 이것도 인간이다. 고삐 풀린 뇌는 시야를 좁히는 방향으로 달릴 수도 있다. 쥐나 개구리나 벌레보다 좁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시장이 털리고, 통장을 빼앗기고, 뺨 맞고, 목이 떨어질 때까지도 망상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인간이니 그렇다. 깨어야 한다. 번쩍!

 

착각

전쟁과 재앙은 닮았다. 재앙은 자연이 일으키는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재앙이다. 죽인다.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 둘 다 나쁘다. 전쟁은 더 나쁘다. 전쟁은 인간 관계를 파괴한다. 전쟁은 인류가 진보하면 할수록 더 극렬해지고 있다. 인류는 전쟁 청산에 실패했다. 착각 때문이다. 재앙은 생존자를 남기지만,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남긴다. 착각이다.

 

실패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를 묻어 놓고 ‘호국 영령’이라 주장하는 굿판을 벌리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프랑스는 약탈해간 조선의 의궤를 보내주면서 끝내 '대여' 라는 단서를 달았다. 프랑스도 일본도 실패다. 전쟁 준비 족속일 뿐이다. 프랑스 편에서 싸웠던 이들이나, 일장기 동여 묶고 사지로 나섰던 이들이나, 죽어 묻혀 있는 이들의 바람은 전쟁이 아니다. 싸우는 방편 외에는 다른 길을 열지 못한 조상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

 
 

생존

전쟁도 재앙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생존자만 있을 뿐이다. 생존자의 자리에서 전쟁의 부채와 자산을 모두 상속해야 한다. 승자나 패자나 미몽에서 깨어야 한다. 와신상담 오월동주는 그 개인에겐 드라마일 수 있다. 초딩들을 위한 자기개발용 옛날이야기 정도로 활용하는 건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남용은 금물이다. 인류라는 집단에겐 재앙일 뿐이기 때문이다. 승자의 수성도 패자의 공성도 다 모자란 이야기다. 진보하지 않으려는 핑계다. 승자의 오만이나 패자의 앙심이나 본질은 같다. 동전의 양면이다. 전쟁의 양 날개다. 나쁘다. 더 참혹한 재앙의 뿌리가 될 뿐이다.

 

거인의 일

오월이다. 우리 곁에 살던 거인이 떠난 달이다. 그 오월이다. 벼랑 끝에 선다. 그 거인은 변방의 작은 나라, 지방 동네 벼랑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재앙을 피하지 못해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는 인류의 중심에 있었다. 인류가 치룰 재앙에 처음 재물이 될 민족의 운명, 그 중심에서 한발도 물리지 않았다. 거인은 온 몸으로 맞섰다. 그 죽음으로 잠드는 민족을 흔들었다. 깨웠다.

 

생존자의 일

전쟁은 "누가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재앙이다, 재해다, 사고다. 인류가 전쟁을 통해 결정한 것은 한 줄로 요약된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게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 존엄, 평등하게 사는 것, 사람 사는 세상이 인류의 결정이다. 생존자의 자리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열어야 한다. 인류 역사를 통째로 보는 거인처럼 살아야 한다. 거인의 시야를 탑재하고, 거인처럼 사유하고 거인처럼 움직여야 한다. 생존자는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해야 한다. 위대해지는 것이 생존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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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 가정 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었어요. 기관에서 제공하는 무료 상담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마련 행사가 진행 중이었죠. 참 훌륭한 일을 하는 곳이긴 했는데, 솔직히 말해 전 좀 불편했어요. 그 기관에 대해서, 혹은 그 기관이 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제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팸플릿을 하나 봤기 때문이었어요. 이 팸플릿은 가정 폭력을 끝내자는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을 광고하고 있었어요.

오늘날 가정폭력을 끝내자는 건 참으로 훌륭한 목표에요. 거기에 대해선 논쟁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 누가 가정폭력을 끝장내고 싶지 않겠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모든 여성또는 오직 여성만이라고 말하는 것들, 또는, 이 문제에 있어 오직 남성만이또는 넌 남성 성기 혹은 여성 성기를 가졌으니 낄 수 없어”, 또는 네가 남성 혹은 여성의 집단에 일원이니 무언가 잘못이 있어식의 것들은 항상 절 좀 짜증나게 만들어요......

, 농담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정말로 절 짜증나게 만들어요. 왜냐면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한 쪽을 제외시키면,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에요.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특정한 인구통계학적 카테고리에 손가락질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사고는 일종의 맹점, 편견, 편협성을 표현하게 돼요. 만약 제가 유대인들을 지목해서 그들이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한다면, 전 편협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젠더(gender) 문제는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질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보통 한 쪽 성()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하죠. “, 그들은 이래또는 그들은 저래

그렇다면 이러한 성적 편견이 이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 제가 그 팸플릿을 읽었을 때, 전 스스로에 질문을 던져 보았어요. 가정 폭력을 멈추자는 캠페인에서 남자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아예 치지도 않는 걸까? 그들은 고려되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해요. 남성은 가정폭력의 가해자다, 그렇지 않나요?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칼을 들고, 총을 쏘고 집을 날려버리는 것은 남성이다. 남성은 가해자고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다. 팸플릿에 공공연히 써져 있진 않았지만, 분명히 이건 흔한 인식이에요.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세요, 그들은 말할 거예요, 남성이 문제고,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라고요.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반드시 “모든 여성All women”이 “모든 남성all men”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에 맞서야 하는 걸까요”?

개인적으로,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제 자신의 삶을 가지고 직접 예를 들 수 있어요. 왜냐면 제가 어렸을 때, 저 역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여러분이 예상하는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제가 심각한 정서적 심리적 학대, 게다가 (심각하진 않지만) 물리적 학대까지 겪긴 했지만, 그건 남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의한 것이었어요. 정말 있는 그대로 얘기하건대, 제가 태어난 이후로, 절 학대한 것은 여성이었어요. 덕분에 전 아직도 그 문제로 씨름하고 있죠.





잘 들어보세요.

제가 두 살이었을 때, 제 아버지는 어머니와 두 명의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떠났어요. 이후 10여년을 제 어머니는 제 동생과 저에게 정서적, 심리적, 그리고 물리적 학대를 가했어요. 물론 전 어머니가 절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 여성은 저와 제 동생을 혁대, 스푼, 기타 가구를 가지고 그게 부서질 정도로 때렸고 우리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 멍이 들기도 했어요. 제 어머니가 저희에게 가한 물리적 학대는 “아빠”가 가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심했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것은 정서적/심리적 학대였어요.

 
그녀는 종종 저와 제 동생을 너무도 긴 시간 동안 궁지에 몰아넣었어요. 상당한 기간 동안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격리시켰고, 우리가 보잘것없고,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었죠. 제 어머닌 그야말로 정서적, 심리적 학대의 교과서적 사례였어요. 그녀는 심지어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으면서 우리를 내팽개쳐둔 채 다리로 달려가 뛰어내리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여러분은 자신의 엄마가 너희들을 혼자 둔 채 떠나겠다고 협박하는 말을 들으면서 원래 부모로부터 받았어야 할 사랑, 주의, 그리고 돌봄을 갈구하는 그런 여덟 살 아이에게 느껴졌을 정서적, 심리적 두려움을 상상하실 수 있나요?

 
전 우리 형제가 경험했던 장기간의 체계적인 학대로 인한 정서적, 심리적 영향에 대해선 세세히 다루지 않으려 해요. 그렇지만, 이러한 학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를 아는 덴 무슨 엄청난 상상력이나 대학원 학위가 필요할 거라 생각진 않아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남성의 폭력으로 인한 여성 희생자라는 그 모든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저를 학대한 건 제 엄마만이 아니었어요. 제 첫 번째 여자친구가 기억나네요. 보니Bonnie라는 이름을 지닌 여성이었죠. 이따금 제 주변을 신나게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제 얼굴을 반복적으로 때리곤 했죠.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제게 “넌 내가 왜 이러는 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대체 거의 1년 가까이 데이트를 해 온 상대에게 이처럼 냉혹하고 비열한 모욕을 할 수 있는지 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거기에 서서 충격에 빠져 있는 것뿐이었어요. 남성은 원래 폭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건대, 전 그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어요. 전 그저 거기 서서 맞기만 했어요. 돌아보면, 전 그게 이 세상에서 당신을 상처 입히고 학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기본적인 진실을 확인하게 해 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이건 겨우 두 가지 사례에 불과해요. 제가 1학년 때 만난 수녀, 여자 영어 선생님, 또는 제가 아이였을 때 절 돌본 사촌도 있어요. 절 돌본 사촌은 침대 밑의 괴물 이야기를 가지고 어린 아이를 겁주는 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했었죠. 그 밖에도 제 삶에서 폭력적이고 학대적인 여성들은 많았어요.

제가 말하려 하는 요지를 파악하셨나요?

 
만약 제가 제 경험에 근거해 설문조사에 응한다면, 제가 가장 폭력적이고 비열하다고 느낀 성은 바로 여성이 될 거예요. 제 경험 속에서 남성은 심지어 척도 상에 점수로 매겨지지도 않을 정도에요.

그리고 전 여성의 폭력을 경험한 것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부부는 우리가 살고 있는 St/ Albert의 지역 공동체 내에서 40 여 년 동안 가정 폭력 상담사들을 찾아다녔어요. 이건 흥미로운 이야기에요. 그들은 어느 날엔가 어떤 상담자의 사무실에 나타나선, 부인이 그녀가 얼마나 남편의 폭력에 희생되었는지를 과장되게 떠벌려요. 그러면 상담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뭐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각본에 따라 행동해요. 남편을 비난하고 그러한 기반 위에서 상담을 진행하죠. 그렇지만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에요. 40 년 동안의 오리무중 상담이라니! 제가 그들을 몇 회기 만나고 보니 사실 그 여성 역시 학대자라는 점이 분명해졌어요. 40년 동안이나 그녀는 휘두르고 소리치고, 할퀴고, 꼬집으면서 그녀의 아이들에게 한 바탕 정서적, 심리적 학대를 가했으며, 놀라운 것은, 이 작고 지루한 동네에서 이 부부가 만난 그 어떤 심리학자도 그녀가 학대자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것은 St. Albert의 상담 기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커다란 실패나 마찬가지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이러한 실상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 그녀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20여년 동안이나 심각한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도 보나마나 뻔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리고 이 문제가 특히 더 골치 아픈 것은, 이런 광경을 40년 동안이나 지켜 본 남편이 마침내 자신의 부인을 때리게 된 것임에도, 체포되고, 고소되고, 감옥으로 가는 건 '그' 라는 점이에요. 달리 말하자면, 그는 남성의 폭력에 대한 통계치, 그리고 '증거' 가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여성의 폭력이라는 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감춰진 채, 그렇게 잊혀져요.



아마도 여러분은 이제 제가 왜 그토록 “모든 여성ALL WOMEN” 캠페인 때문에 짜증이 났는지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진짠가요?

 
정말 모든 여성이 가정 폭력을 멈추길 원하나요?

 
모든 여성이 희생자이던가요?

 
모든 여성이 남성에 대항해야 하나요?

 
질문이 단순하죠? 가정 폭력을 끝장내길 원하는 여성이 가정 폭력을 끝장내길 원하는 남성과 함께 서서 사회적 각본과, 성역할로부터 벗어나 이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는 건 어떨까요?

 
왜 여성이 단독으로 다뤄야 하나요?

 
오직 남성만이 학대한다는 착각을 영속시켜야 할 이유는 뭔가요?


,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덴 여러 이유가 있어요. 첫째, 미디어가 이런 착각에 영합하고 있어요. 그들은 뉴스에서 여성들의 학대 피해 사례들을 집중조명하면서 우리에게 남성의 폭력이란 “현실”을 제시하는 경찰청 사람들 같은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거나 아니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여성 폭력의 사례들을 무시하죠.

 
둘째,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을 사용하도록 사회화되었어요. 하나는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죠. 남성은 주먹, , 총을 사용하도록 독려 받죠. 소년들에겐 액션 피규어가 주어지고 '나쁜 놈(the bad boy)' 라 정의 내려진 모든 이들을 때려눕히고 날려버리라고 배우죠. 반면에, 소녀에겐 인형, 곰인형이 주어져요.

 
만약 소녀가 액션 피규어를 집으면, 빼앗기게 되죠. 그 결과, 소녀와 소년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을 익히게 돼요. 결과적으로, 남성이 자행하는 폭력은 더욱 가시적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때린다면 그 상처는 분명할 거예요.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아이에게 욕을 퍼붓고 아이를 위축시키거나 느낌을 상하게 만든다면, 그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여성의 폭력은,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남성의 폭력보다 조금도 덜 해롭거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에요. 제 딸아이의 학교의 교감이 최근에 제게 말했던 것처럼(그리고 모든 초등학교, 중학교 선생님들도 공감할 거예요), 소녀들은 학교에서 위계적인 등급매기기 행동들을 습득한 후, 소년들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악의적일 수 있어요. 소년들은, 그 교감이 말하길, 운동장에서 서로 싸우고 그걸로 끝나지만, 소녀들은 반면에, 미묘하고, 종종 공동으로, 매우 악의적인 공격을 가한다고 하더군요.

소년들은 주먹을 쓰고; 소녀들은 그들의 감정과 말을 쓰죠.,

그것은 서로 다른 유형의 폭력이에요.

하나의 사회로서의 우린 그저 여성이 행하는 폭력과 학대를 인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심각하고 해로운 문제에요. 진정 폭력적인 어린 시절을 경험한 한 작은 소년으로서 증언하건대, 전 제 삶 속에서 여성의 지속적인 정서적 테러에 당하느니 차라리 남자한테 맞는 편을 택했을 거예요. 적어도 때리는 건, 그 고통이 언젠간 사라지거든요. 적어도, 제가 남자한테 맞았다면, 어떤 사회복지사나 심리학자, 교사가 그걸 알아차렸을 것이고, 저와 제 동생은 우리가 필요한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수 십 년 동안의 사회화를 거치면서 조용하고도 눈에 띄지 않는 학대를 감내해야 했던 우리 St. albert 의 한 가정의 아이들과는 달리 말이죠.

물론, 미디어의 무지나, 폭력의 성격과는 별도로 여성의 폭력의 보이지 않는 다른 이유들도 있어요. 세 번째 이유는 우리, 폭력을 경험하는 우리가 종종 더 심한 학대를 경험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걸 감춘다는 거예요. 한 명의 젊은 남성으로서 전 그 누구에게도 제 여자친구가 제게 한 짓을 말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만약 제가 했다간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에요. 전 제 친구들의 반응이 어땠을 지 알고 있어요. 그들은 제가 그녀에게 맞받아치라고 말했을 거고 절 비웃으면서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여자한테 맞았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리고 신이시여, 전 경찰서까지 가서 그걸 알리려고 했었어요. 전 제 젊고 연약한 남성 자아가 그 모든 조롱을 견뎠을 거라 생각지 않아요. 그래서 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켰죠.

넷째, 우리는 여성들이 자행하는 폭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여성들이 하는 일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때린다면, 그건 분명 폭력적이에요. 하지만 여러분이 어떤 이의 생김새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혹은 그가 나쁜 “인구통계학적” 집단의 소속이라고, 혹은 비실거린다고 그 사람을 여러분의 사회적 집단에서 배척한다면, 만약 여러분이 그들을 모욕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든다면, 손가락질하고 비웃는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에요.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이 폭력인 거죠. 심리적, 정서적 학대를 저지르는 소녀들은 좀처럼 폭력의 레이더 망에 포착되질 않아요.

마지막으로, 우린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맞서야 할 심각한 성적 편견을 갖고 있어요. 특히 남성의 정서와 그 민감성에 대해서 말이죠. 소년은 터프해야 한다고 그래요, 그렇죠? 소년은 감정을 지녀선 안 된다고 그래요. 소년은 느낌을 가져도 안 된다고 그래요. 소년은 울면 안 된다고 해요. 소년은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해요. 소년은 “뭉쳐서 그들의 힘을 보여주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고 하죠. 간단히 말해, 소년은 자신들을 정서적으로 거세하게 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찐따, 게이, 나약한 녀석이 되고 말죠.

 
그렇다면 만약 어떤 소년이 어떤 여성에 의해 맞는다면, 혹은 어떤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한테 맞고 운다면, 그것은 그 소년의 문제인 거예요. 소년이 약하기 때문에 맞은 거라는 거죠. 만약 그가 터프해져서 남자처럼 행동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 하죠. 솔직히 말해, 그건 성차별적인 똥덩어리 같은 소리에요.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를 그런 식으로 키우면 결국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그런 정서적으로 거세된 남성들의 사회라는 결말을 맞게 될 거예요. 만약 그들의 어린 시절의 정서적 예민함이 그들에 의해 사회화되지 않았다면, 아이가 원래보다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은 더욱 커질 테고요. 여러분이 이 글의 핵심을 아직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제가 해 드릴게요.

 
여성들은 남성들이 자행하는 폭력에 남성들만큼이나 책임이 있어요. 여러분이 자신의 아이에게 폭력적인 액션 피규어를 건내고, 장난감 무기를 선물로 주고, 그들의 감정을 얕보고, 울지 말라고 말하고, 그들의 정서를 수용하지 못한 채 터프해지라고만 주문하고, 그들의 사랑스럽고 표현적인 본성을 차단하며, 그들을 향해 소리지르고, 고함치고, 때릴 때, 여러분은 다음 세대의 폭력적인 남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결국, 여성은 주된 양육자에요.

가정과 탁아소, 그리고 학교를 살펴보세요.

아이가 태어난 후 첫 십 년 혹은 그 이상 동안 아이들을 사회화시키고 돌보는 것은 바로 여성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그 모든 걸 유전자 탓으로 돌리지 않는 한(, 남성은 타고나길 폭력적이다),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적어도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폭력에 얼마간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이제 전 이 통계적으로 편향된 범죄적 체제에 대해, 그리고 정서적으로 거세된 남성이 어떻게 체제The System 의 필요조건들을 충족시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미 핵심은 밝힌 만큼,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으려 해요. 제가 이 지점에서 하고 싶은 말은 만약 여러분이 가정 내의 폭력을 멈추는데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영속화시키는 일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람들, 여자아이, 남자아이, 어린 아이, 그리고 여러분의 배우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길 기대하는 지를 살펴보시고 여러분이 가정 폭력이란 문제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구는 일을 멈추세요.

 
우리 모두가 그 문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가 ‘성적 눈가리개gender blinders’를 벗어 던질 때까지, 우리가 스스로를 여러 집단으로 가르기를 멈출 때까지, 우리가 서로를 자신의 집단으로부터 배척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젠더gender 게임을 멈출 때까지, 우리가 함께 서서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직면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우린 우리 사회에서 폭력을 멈추겠다는 우리의 목표를 향해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외면한 채, 진실을 숨기고 신화와 착각을 영속화시키는 거나 다름없어요.

 

글쓴이 Michael Sharp

옮긴이 오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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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나다 사람 피엘


피엘 빠리조. 우리나라와는 별 관계가 없는 한 캐나다인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떳다. 일본인의 전범 추모 행위에 이의를 제기 한 외국인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는 이 동영상이 촬영 된 때는 2009년 8월 15일이다. 장소는 야스쿠니 신사,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를 호국 영령이라 주장하며 묻어 둔 곳이다.

다모가스 도시오, 전 항공 자위대 막료장이라는 자가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게 우리들의 마음으로 감사하는 날이 8월 15일이 아닌가 합니다."하고 중얼거리는 인터뷰 말미에 사건은 시작된다. "질문해도 될까요?" 라며 유창한 일본어로 질문을 던지는 외국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가 '피엘 빠리조' 다.

 


 

항의

피엘의 질문은 "독일인이라면 체포되는 것을 알고 있느냐?" 는 것이다. 전쟁 범죄자를 추모하는 것이 불법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답변으로 거센 항의와 욕설, 손가락질을 당하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일본의 이런 비상식적인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였다. 답으로 더욱 거친 항의와 욕설이 이어진다. 손가락질을 넘어 그가 메고 있던 가방을 끌어당기는 등의 신체적인 위협까지 당한다.

 

비난

그의 동영상 관련 기사가 올려지고, 댓글이 달린다. 대부분이 일본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비난만 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인류의 역사, 안타까운 동아시아의 현대사가 담겨있다. 일본과 독일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피엘이 던진 질문은 중요하다. 일본인들의 항의와 욕설에도 묻힐 수 없고, 일본을 비난하는 것으로도 가려져서는 안 된다. 정당한 질문에 진실한 답이 따라 줘야 한다.
 

 


 

전쟁

전쟁은 무엇인가? 사전 <한플러스국어사전, 성안당> 상의 풀이는 나라끼리 무력을 동원해서 벌이는 싸움이다. 나라나 그에 준하는 집단의 싸움이다. 무력을 동원한다. 죽고 다친다. 여기 경쟁 등 여타의 행위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죽음이다. 죽는다. 죽음을 각오한 격돌이다. 전쟁은 왜 하는가. 이긴 집단이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다른 수단으로 극복할 수 있다면 전쟁은 끝난다.

 

질문

질문을 보자. 전쟁 범죄를 미화하는 짓이 독일에서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일본의 이런 비상식적인 모습이 괜찮은가?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피엘의 질문은 합리적이지만 어리다. 좋은 질문이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물론 이런 질문을 받고 일본이 정신을 차린다면야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기적이다. 일어나지 않는다.

피엘 질문에 답해야 할 국가가 있다면 미국이다. 전쟁 후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논공행상한 것은 미국이다. 패전한 국가의 논공행상이란 말이 격에 맞지 않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달리 쓸 말이 없다. 독일의 시민들은 패전을 인정하고 전범세력을 청산했다. 2차 세계대전을 주동했던 세력은 지금 독일을 주도하는 세력의 적이다. 정치와 사회 시스템으로 보면, 전후 독일을 재건한 국민과 정치세력은 모두 승전국의 유산을 상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본과 일본 국민은 승전 유산의 상속 자격을 박탈당했다.

 
 

2. 일본 전쟁
 



일본에서는 전쟁 주도 세력이 패전 정리 과정에서 살아남았다. 그것도 아주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군사강국 미국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다. 일본에서는 패한 전쟁에 대한 청산이 없었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전이 없었다.

앞에서는 미국에게 숙여도 뒤에서는 절치부심, 와신상담 중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 일본의 주인이다. 일본이 전쟁 선언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힘이 없어서다. 힘만 회복 된다면 전쟁은 다시 시작된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일본에서 전범들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칠 때, 한국에서는 친일세력이 같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두 세력은 두 국가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한 두 세력의 마음속에서 전쟁은 끝난 일이 없다. 그렇다 일본은 오늘도 전쟁 중이다.


인류 전쟁

내용대로 말하면, 한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다. 1, 2차 세계대전은 여기 극동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왜? 논공행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논공행상의 실패는 곧 전쟁의 시작이 된다. 무력이 부족한 세력은 무력을 키워서 준비하고, 무력이 강한 세력은 더 강한 무력을 길러 다음 전쟁을 준비한다. 더 확실한 승리, 혹은 지난 패전의 상흔까지 되갚아 줄 역전승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몸이 굴복했을 뿐, 머리는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이유가 해결되어야 전쟁이 끝난다.

논공행상의 실패는 충분한 전쟁 이유가 된다. 미국을 비롯한 이긴 국가들의 이기적인 전후처리가 승전 국가들만의 잔치에 치우치면서 종전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기록상으로는 종료되었다. 그러나 곧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다. 세계 대전은 아직 진행 중이다. 유럽식의 정의만 외치는 분노나 미국식의 정의를 가장한 약소국 약탈로는 인류 전체가 진보할 수 없다. 그럼으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다른 인류를 속박하고, 비참하게 하고, 차별하여 누리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지속가능하지 않다. 인류는 아직 전쟁 중이다.


큰 전쟁의 처음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세계대전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할까. 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한 날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작업의 발달로 보자면 1705년 토마스 뉴커멘의 발명하고, 1769년 제임스 와트가 상용화에 성공한 한 증기기관이 작동한 그 날이 시작일 수도 있다.

사유의 발달로 보자면 1789년 8월 26일 인권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프랑스 제헌국민의회가 승인하고 선언한 그 날이 시작일 수 있다. 그 날 큰 일이 난 것이다. 큰 차이가 선언 된 것이다. 큰 차이가 만천하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차이가 충분히 좁혀질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불리는 이름만 바뀔 뿐이다.

 

큰 차이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 제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선언은 널리 퍼져나갔다. 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世界人權宣言,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으로 이어진다. 국제연합 총회에서 가입 국가 58개 국가 중 50개 국가가 찬성하였다고 한다. 국제연합의 결의로 세계에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제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이다. 프랑스 인권선언 후 159 년만 이다. 국제연합에서 신생 독립국 조선의 남한과 북한은 둘 다 나라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세계의 진보와 큰 차이가 난 것이다. 좁혀지지 않는 차이는 곧 전쟁이 된다. 한국 전쟁은 1950년 시작 되었다. 2011년 오늘까지도 한국은 아직 전쟁 중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는, 인류는 아직 차이가 크다.

 

정리하면,
 

1. 큰 전쟁은 큰 차이 때문에 시작된다.

2. 큰 차이의 시작은 작업의 혁명, 사유의 혁명 때문이다. 차이가 좁혀져야 전쟁은 끝난다.

3. 유럽과 미국 등 2차 세계대전 승전 국가가 자국의 이해관계만 해결하는 논공행상을 했다.

4. 일부 지역에서 전쟁은 멈추었지만, 세계는 전쟁 중이다.

5. 큰 차이가 좁혀져야 전쟁이 끝난다.

 

 

3. 사람의 길





만델라의 선택은 피엘이 했어야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차이를 좁히는 방법, 전쟁이 아닌 다른 길이 있는가. 만델라는 아래와 같은 선택을 했다. 남아프리공화국이라는 국가의 국가폭력은 인류 성취한 수준의 한계 탓이다.

인간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파르헤이트는 남아공의 백인정권이 시연했지만, 백인정권의 시작은 만델라의 나라 밖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각성하지 않는 유러피안들에게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 전체가 각성하지 않는다면 길은 없다. 힘들고 괴롭고 위험해도 인류 전체가 각성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  위키백과 -

 

 
 

사람 사는 세상




김대중의 '용서와 화해' 의 길, 노무현의 '사람 사는 세상' 의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한 길이다. 언제라도 이명박과 한나라당과 같은 세력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각오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권력을 잃으면 조롱과 박해와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다.

군벌도 언론도 재벌도 입법권력 사법권력 행정권력 힘 있는 자들은 모두 이 차이가 좁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나라에서 사람 사는 길은 험하다. 위험하다. 그러니 더욱 각성해야 한다. 유럽 안의 프랑스는 분노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아시아 안이 한국은 분노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각성해야 한다. 처절한 각성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각성 실패는 곧 전쟁 시작이다.


사람의 일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이 각성은 작업의 발달과 사유의 발달에 근거한다. 사람은 그렇다 한번 정신이 들면 돌이 킬 수 없다. 물릴 수 없다. 격발된 총알이다. 쏘아진 화살이다. 태양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반드시 봄이 온다.

작업 발달과 사유 발달을 막을 수 있다면 모를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모를까. 사람답게 일하는 맛을 알아버린 사람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한국과 일본에 포진한 독재, 독점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속한 자들은 반드시 청산된다. 오늘에 만취한 자들에게 내일은 없다. 오늘의 권력에 미쳐 다른 사람을 쥐어짜는데 골몰하는 자들은 반드시 망한다. 이미 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사유의 진보

사람의 일의 시작은 사유의 진보에 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확고한 사유의 진보에서 사람의 일이 시작한다. 여기서 시작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 이 일은 실패해도 망하지 않는다. 망해도 끝나지 않는다. 실패의 소문이 사람을 모여 들게 한다. 크게 실패하여 망해도 사람들을 뭉치게 한다. 뭉치다 죽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사람은 그렇다. 다음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 할 맛이 나기 때문이다. 살맛이 나는 까닭이다.
 

작업의 진보

사람의 일의 실현은 작업의 진보에 있다.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내연기관, 전기기관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핵심은 기관(機關)이 발명된 것이다. 기관은 이미 있었다. 태양계가 곧 기관이다. 자동 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고, 태양기관은 우주에 속한 힘으로 움직인다. 이제 인간 육체노동이 생존과 진보의 필수 요소에서 제외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동 기관을 만들고 관리하여 완성하는 과정에만 개입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작업은 인간 육체의 몫이 아니라 자연 기관의 몫이 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가장 큰 진보다. 가장 중요한 진보다. 우리는 이 큰 진보가 시작 된 다음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태양이 일하고 있다. 지금 인류의 가장 든든한 작업 파트너는 태양이다. 인류의 몫은 육체의 노동이 아니라 두뇌의 노동이다.


 

 

고삐 풀린 뇌

자유롭고 존엄하고 평등해 줘야 두뇌가 일한다. 고삐 풀린 뇌는 펄펄 날뛰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 없던 일을 내고 싶어 한다. 큰일을 내고 싶어 한다. 큰 차이는 큰 성공으로 극복된다. 사람은 사람 일에 나서야 한다. 뇌는 달리고 싶다. 뇌는 춤추고 싶다. 인류의 모든 뇌와 어울려 빛을 발하고 싶어 한다. 두뇌의 축제, 이것이 사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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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표 총장에게 답한다

죽음의 사다리를 걷어치워라!


'잇단 자살 KAIST 서남표 사과하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위와 같은 기사를 보았다.
, 서남표 총장이 사과를? 최근에 연이어 일어난 자살사고에 뭔가 깨달은바가 있었나보군. 카이스트도 이제 좀 변하는 건가? 이런 순진한 마음 +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클릭했다.

근데 화면에 뜬게 앗, 젠장 중앙일보다. 똥 밟은 심정이지만 그래도 일단 내용은 읽어보았다


서남표(사진) KAIST 총장은 5일 최근 잇따른 학생들의 자살과 관련, “고인의 가족, 친구 그리고 국민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KAIST에서는 1월 8일 1학년 조모(19)군이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올해 들어 학생 3명이 자살했다. <본지 4월 1일자 18면>

 서 총장은 이날 KAIST 사이트에 올린 ‘KAIST 가족 여러분께-A message from the President’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올해 KAIST는 유난히 슬픈 사건을 많이 겪고 있다”며 “우리가 좀 더 많은 노력을 했다면 소중한 생명을 잃는 비극적인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서 총장은 “KAIST나 하버드대 같은 대학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 대학의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 고 밝혔다. 그는 “KAIST는 학사, 상담, 생활, 학비 문제 등 학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걸쳐 개선할 점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 총장은 앞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즐거운 대학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 신입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등 자살 방지 예방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중앙일보 |김방현 |입력 2011.04.06 01:38



음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 하면서 무심코 넘어가려 했지만, 뭔가 좀 구린 냄새가 났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룬 다른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았다.

... 역시나 편집의 달인 중앙일보. 중요한 대목을 빼놓으셨다. 빠진 부분은 아래와 같다
 


그(서남표 총장)는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일류 대학의 경우 개교 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계속 있어왔고 명문대학의 학생들은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있다"면서 "게다가 KAIST 교수님들의 학문에 대한 원칙과 학생들에 대한 높은 기대로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부담감을 많이 갖고 있고 학생들 스스로도 취업 등을 준비하면서 재정적인 압박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KAIST나 하버드 같은 대학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 대학의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라면서 "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많이 갖고 있겠지만 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며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KAIST는 학사, 상담, 생활, 학비문제 등 학교가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걸쳐 개선할 점이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린 만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지금의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 박주영 | 입력 2011.04.05 19:07 



사과? 저딴 걸 사과라고 부르는가?
중앙일보는 국어사전을 따로 만들었나보다. 저런 걸 사과라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진정성도 없고, 반성도 없고, 죽은 학생들에 대한 제대로 된 공감도 없고, 무엇보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근데, 저런게 사과라고?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있는 일류 대학들은 개교이래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 있어왔다고?
그건 그렇다. 서울대도 그렇고, 미국의 명문대들도 그러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걸로 카이스트의 자살사고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싶었던 걸까?

명문대학의 학생들이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경쟁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받아들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자세에 달린 만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지금의 실패와 좌절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조언(?)을 지금 우리보고 귀담아 들으라는 건가?
 


참담하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의 수장으로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왼 닭 : 사과해!
 

오른 닭 : 뭘?


왼 닭 : 일단, 네가 대체 뭘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걸 사과하렴.








서남표 총장과는 반대로, 같은 카이스트 출신의 정재승 교수는 이번 자살사고를 두고 그나마 진정어린 걱정과 조언을 내놓았다.
 



정재승 교수는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어제 우리학교 학생이 자살을 했습니다. 올해 들어 벌써 세번째. 학교가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최근 벌어진 학생들의 자살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정 교수는 이어 "이번에도 근본적인 대책없이 넘어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이라고 덧붙이며 "학교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안에서 학생들이 학문의 열정과 협력의 아름다움, 창의의 즐거움을 배울수 있도록 장학금제도를 바꾸고, 교수-학생,학생-학생간의 관계를 개선해야한다. 카이스트가 "질책이 아닌 격려의 공간"이 되길"이라고 자신의 바람을 피력했다.

또 정 교수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경쟁의 압력속에서 삶의지표를 잃은 학생들에게 교수로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 뿐 입니다. 학생들의 일탈과 실수에 돈을 매기는 부적절한 철학에 여러분을 내몰아 가슴이 참담합니다. 힘들 땐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제발"이라며 학생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당부의 말 또한 전했다.
 


마이데일리 | 유영록 | 입력11-03-30 18:15



정재승 교수가 바로 보았다. 문제의 본질은 경쟁에 경쟁을 거쳐 카이스트라는 최고의 교육기관에 입학한 인재들조차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경쟁의 압력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목적을 잊고 부적절한 철학에 내몰려 자살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타살을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은, 정교수가 참담한 가슴으로 한 말이 겨우 "힘들 땐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려주세요. 제발"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뭐, "서남표는 물러나라!"라고 말하긴 쉽지 않을테니 이해는 간다. 하지만, 학생들이 교수들의 방문을 두드릴줄 몰라서 안 두드리는걸까?

어차피 말해도, 이제 다른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기준에 의해, 평가에 의해 다른 누군가와의 경쟁에 내몰리는 것이 지쳤다고 말해도, 
그 무엇도 바뀌지 않으리란 절망이 가슴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 죽는가? 

욕망을 잃었을 때 죽는다. 

더 이상 상승하려는 의지를 잃었을 때 죽는다. 

빛이 바래어서 죽는다. 


-김동렬-



경쟁으로는 인간을 상승시키지 못한다. 
2등까지는 어떻게든 바둥바둥거리며 올라가게 하지만, 결코 최고의 자리엔 오르진 못한다. 
경쟁력이 떨어져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는 비교를 불허하는 존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이며, 비교할 때의 그 기준은 내 안의 것이 아니라 바깥의 것을 빌어다 쓴다. 바깥의 자를 빌어쓰는한 그는 영원히 비교를 '당한다'. 운이 좋아 반에서 1등을 하면 전교 1등이 기다리고 있고, 전교 1등하면 그다음엔 시군구 1등, 그 다음엔 도내 1등, 그 다음엔 전국 1등, 그 다음엔 세계 1등, 그 다음엔 우주 1등, 그 다음엔? 하느님이랑 1등 자리 두고 맞짱 뜰건가?

그 전에 인간은 죽고 만다. 아득바득 사다리 윗단까지 올라가려 하지만, 그 위엔 자신이 찾던 빛나는 별이 없음을 알기에 그만 절망하여 죽고 만다. 허무해서 죽는다. 




경쟁을 열렬히 지지하는 하비 루벤 같은 사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쟁을 하는데 뛰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 목표를 달성하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오히려 목표가 멀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승리가 사실 공허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경험하는 가장 충격적인 일이 된다."

-책 <경쟁에 반대한다> 151쪽-




애당초 인간의 상승 의지는 공동체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데서 나온다.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가족의 중심에 서고, 친구들과의 우정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무리의 중심에 서보고, 동료들과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일의 중심에 서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 위험이 닥치면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서 역사 앞에 거룩한 분노를 실천해 사회의 중심에 서고, 공감을 확장시켜 마침내 전체 생물권까지 감싸안아 '풀한포기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의 가운데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서 진정한 상승 의지가 나온다. 

그러나 경쟁은 결코 상승의지를 낳지 못한다. 경쟁으로 가능한 것은 겨우 상승 의지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이의 그림자만 쫓는 것일뿐. 누가 더 그림자에 가깝게 갔는지를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사다리의 윗단까지만 갈 수 있을 뿐. 사다리를 타고 별을 딸 순 없다. 별은 감히 사다리로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 별은 인간의 가슴에 상승하려는 의지로 빛나고 있으며, 그 빛이 바랠 때 인간은 죽는다. 그 빛을 기어코 죽이려는 자들이 있다. 서남표 총장은 그들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사다리 윗단에 서서 아랫단에서 열심히 기어오르는 자들을 향해 말한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야"
"경쟁을 피하는 자는 경쟁을 두려워하는 거야"
"열심히 경쟁하면 너도 사다리 윗단에 오를 수 있을 거야"
"경쟁을 이겨내면 너는 강해질 거야"
.........


그렇게 <낡은 세상Old World>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안다. 젊을수록 더 잘안다. 나이든 사람들이 아무리 이 미친 세상을 정당화하려 애를 써도, 아직 영혼의 촉수가 살아있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마침내 온몸을 던져 자신의 촉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만다.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으며, 경쟁은 인간의 본성도 아니고, 경쟁이 두려워서 경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나은 방법이 있기 때문에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열심히 경쟁하면 사다리 윗단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 아랫단에 있는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며, 경쟁을 이겨내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진정한 상승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서남표 총장은 말했다, 앞으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즐거운 대학생활’ 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 신입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등 자살 방지 예방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그래,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 상담 전문가들, 정신과 의사, 임상 심리학자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자살방지예방책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진짜 예방책은 따로 있다. 

바로, 서남표 총장, 당신이 나가야 한다. 당신이 나가고 그 자리에 '경쟁'이 아닌 '배움을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교수/학생, 학생/학생 간의 협력을 통한 집단지성의 구축'을 토대로 한 진정한 학문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지닌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학점 따위로 인간을 길들이려 하는 자는 필요없다. 장학금이란 푼돈으로 인간을 개처럼 만들려는 작자는 필요없다. 그런 식으로 자살은 예방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힘을내렴, 세상이 원래 그렇단다. 그러니 어떻게든 힘을 내서 잘 살아보자꾸나" 식의 메시지를 던지는 한,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진정한 변화없이 개인의 변화를 요구하는 한, 절망은 계속되고, 자살도 계속 된다. 

대부분의 자살은 사회에 의한 타살이다. 자살은 공동체의 책임이다. 공동체의 중심으로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한 개인의 마음에 학벌, 인종, 성별, 계급, 성적 등 온갖 콘크리트벽을 쌓아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면,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타살이다.

서남표 총장에게 말한다.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카이스트 구성원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당신들이 너무나 열심히 일해서, 너무나 열심히 학생들을 못살게 들볶아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 제발 노력하지 말아라. 사다리를 열심히 정비해서 미끄러져서 죽거나 다치는 학생이 없게 하겠다는 식의 개혁은 때려치워라. 

그냥 죽음의 사다리를 당장 치워버릴 것을 권한다. 아니, 권한다는 말로는 너무 약하다. 

지금 당장, '경쟁'이라는 죽음의 사다리를 치워라!






 

 
     
  
wrote at 2011.04.07 09:26
세상에.. 어찌 저런말 사과라고.....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할 댓가,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 없다고요??
그래서 자살 같은 일은 당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네요.
정말 한심하다 못해 가증스럽기까지...
어찌 저런 마인드로 교육자가 된건지.....화가나네요. 정말....
wrote at 2011.04.11 03:32 신고
오늘 뉴스에 카이스트 학생에 이어 카이스트 교수도 자살했다고 하네요. 단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이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의 부재가 낳은 비극적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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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의 성공, 신정아의 실패, 사람의 일



무엇을 믿습니까?


진화론은 충격이었다. "진화를 믿습니까?" 라는 질문은 해도 "진화가 맞습니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침팬지와 사람이 같은 조상 밑에서 나왔다는 발견을 면대면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현대에도 위험하다. 여전히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려야 한다. 교과서에서는 발견의 결과이지만, 현실에서는 믿음의 결과처럼 반응한다. 

 
 




《종의 기원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는 1859년에 출판되어, 생물진화론의 새 장을 연 찰스 다윈의 책이다. 책의 원래 제목은 《자연선택의 방법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 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이다. 1862년의 6판부터는 제목을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으로 바꾸었다.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 책은 출간 즉시 당시의 종교적인 믿음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큰 논쟁을 일으켰다.



다윈은 1858년 린네 학회에서 논문 발표라는 형식으로 훗날 '진화론' 이라 불리게 될 주장을 시작했다. 1859년 ‘종의 기원에 대하여' 까지 발간하며 이 놀라운 주장을 계속하자, 영국 지성과 언론은 강렬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다윈은 인간의 탈을 쓴 원숭이가 되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충격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국의 지성과 언론 중 다수는 한 박물학자을 미치광이로 만들어 이 논란을 끝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헛되었다. 끝은 없었다. 더 큰 충격과 논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경악스럽고 발칙한 주장을 지지하는 발견이 쏟아 진 것이다. 이 거대한 충격을 일으킨 발견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4%의 차이


2005년, 다윈의 나라 과학잡지 '네이처'에 침팬지 게놈을 완전 해독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미국의 연구자들이 주도한 24살짜리 수컷 침팬지 '클린트'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사람과 침팬지의 DNA서열이 96%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클린트'란 녀석과 나의 유전적 차이는 단지 4% 라는 것이다. 연구는 계속 되었다.








미국 스탠퍼드대, 조지아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합동 연구팀은 침팬지와 인간의 게놈 지도를 비교 분석한 결과 인간 게놈에는 퇴화 흔적만 있지만, 침팬지 게놈에서는 여전히 견고한 구조를 갖춘 DNA 조각 2개를 찾아냈다. 연구진은 이 중 한 개가 두뇌 발달을 방해하는 물질이라고 결론 내리고 이게 사라지면서 인간 지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결론 내렸다. 인간에게 사라진 또 다른 DNA 조각은 침팬지 성기에 가시(spine)를 돋게 하는 DNA였다. 이게 사라지면서 성교 때 암컷의 고통이 사라져 우리 조상들이 더 오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됐다

 




2 조각, 성기엔 가시, 두뇌엔 고삐
 





아 그랬다. 그 녀석 '클린트'와 나의 결정적 차이는 2조각 이었다. 성기엔 가시, 두뇌엔 고삐. 성기에는 가시spine가 돋게 하던 것과 두뇌 발달을 방해하는 물질과 관련한 것, 두뇌 발달을 막는 고삐가 있었다는 것이다. DNA조각 2개가 나와 '클린트'를 이렇게 갈라 놓았다는 것이다. 두뇌 발달 방해 물질, 두뇌 고삐가 퇴화 되어 풀려 버린 나는 이 밤에 발달하는 두뇌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 글을 쓰고 있고, 녀석과 녀석의 친구들은 뼈와 근육으로 된, 거기에 가시까지 돋은 성기로 침팬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 그랬다. 그 녀석 '클린트'와 나의 결정적 차이는 2 조각 이었다. 성기와 두뇌. 성기에는 가시spine가 돋게 하던 것과 두뇌 발달을 방해하는 물질과 관련한 것, 두뇌 발달을 막는 고삐가 있었다는 것이다. DNA조각 2개가 나와 '클린트' 를 이렇게 갈라 놓았다는 것이다. 두뇌 발달 방해 물질, 두뇌 고삐가 퇴화 되어 풀려 버린 나는 이 밤에 발달하는 두뇌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 글을 쓰고 있고, 녀석과 녀석의 친구들은 뼈와 근육으로 된, 거기에 가시까지 돋은 성기로 침팬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침팬지의 성공
 

수컷 침팬지의 성공은 무리에서 가장 강한 놈이 되는 것이다. 가장 강한 놈이 모든 암컷들과 교미할 권리를 가진다. 암컷들은 발정기가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실패다. 뼈와 근육으로 된 성기 덕에 많은 횟수의 교미가 가능하다고 한다. '뼈와 근육으로 된 성기'를 포기한 선택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가시, 성기에 돋은 가시 덕(?)에 빠른 사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랬다. 빨리 사정해야 성공인 것이다. 신속하게 많은 암컷에게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 그것이 침팬지의 성공이다. 유전자셔틀, 이것이 침팬지의 일이다.

 

신정아의 실패


신정아의 신간 ‘4001’의 출간으로 2011년 한국의 지성과 언론은 뜨겁다. 책 제목이 그녀의 수감번호다. 출간 이틀 만에 초판 5만부가 다 팔렸다고 한다. 자세한 책 내용은 봐야 알겠지만, 제목은 자신의 실패를 상징하는 숫자로 달았다.

1인칭 주관적 작가 시점이다. 한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왜 일까? ‘4001’은 여간해서는 공개되지 않는 한국의 잘 난 강한 남자들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침팬지스타일이 부러우면 실패


이 기록 중 언론이 앞 다투어 공개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침팬지스타일의 수컷 인류가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한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성공했고, 더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보이는 남자들이다. 한 남자는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이로 정치에서 까지 큰 성공을 이루었고, 다른 남자 또한 잘 나가는 언론인을 넘어 말 잘하는 정치인으로 자리 잡은 사람이다.

물론 이 남자들은 솔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는 그들을 ‘싫어’ 했다고 한다. 진실은 하늘과 땅과 그들과 커피숍 의자와 자동차 뒷 자석만이 알지도 모른다. 오해라면 풀면 된다. 거짓이라면 진실을 밝히면 된다. 그러나 침팬지가 부러웠다면 그 지점에서 이미 실패다. 이런 식의 힘자랑이 이야기가 부럽다면 그 순간 모두의 실패다. 사람은 침팬지와는 다른 길을 진화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제일 잘 한다고 난봉질로는 침팬지를 넘지 못한다.

 

 

인류의 선택
 




DNA 구조의 발견에 따르면, 먼 옛날 인류의 아버지는 오직 한사람을 찾아 평생을 함께하는 쪽을 선택했다. 뼈와 근육이 아닌 살과 핏줄로 된 성기에, 돌기마저 버린 것이다. 이와 함께 두뇌의 고삐를 풀었다. 짝짓기의 중심이 성기에서 두뇌로 옮겨진 것이다. 많이 짝짓는 쪽을 버리고, 오래 짝짓는 쪽으로 향한 것이다.

상속 받은 재산이나 세력 없이 일해서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낸 사람들을 자수성가 했다고 한다. 자수성가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기 분야가 있다는 것이다. 한 우물을 판다. 끝장을 본다. 그에 따른 성공과 실패를 겸허하게 수용하며 성장한다. 자기 분야를 찾는 일에 신중하고, 한번 정하면 끝까지 밀어 붙이는 사람들은 실패해도 성공한다. 똑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
 

사람의 일이란 무엇인가. 노래로 하자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이루는 활동일 것이다. 일이란 '님과 함께 살 공간과 에너지' 를 확보하는 것이다. 사람 일의 성공은 공간과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님’이 있어야 성공이 완성된다. 님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직 하나를 만나는 것이 ‘사람 스타일’이다.

침팬지의 길과 사람의 길이 있다. 600 만 년 전부터 각각 다른 길로 달렸다. 잠깐 혹 할 수는 있어도 너무 부러우면 완전 지는 거다. 사람의 길을 권한다. 종종 엄한 데로 달려 때때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지만, 고삐 풀린 두뇌는 인류의 장점이다. 기회다. 가능성이다. 남는 에너지는 창의하는 일에 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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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 반대한다 1경쟁은 무의식이다

 

1.
왜 경쟁하는가
?

"왜 경쟁하는가?"
"도대체 왜 경쟁하는가
?"

조용히, 위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잔잔하던 마음의 수면에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는 왜 숨을 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숨을 쉬었고, 지금도 쉬고 있고, 앞으로도 쉬듯이, 우리가 경쟁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이것에 대해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심지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경쟁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마치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공기도 아니고 결코 자연스럽지도 않다. 경쟁이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 속에서 당신의 지위와 보상이 결정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경쟁이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경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우리는 경쟁을 거부하는 쪽에 가까웠다. 한 번 떠올려보라. 우리들 대부분은 어린시절 승패가 갈리는 게임을 하다가도 패자가 되어 슬퍼하는 친구를 보면 게임의 룰을 기꺼이 바꿔가면서까지도 친구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배려하였으며, 설령 친구가 여전히 승부에 불복하고 게임을 거부하더라도 승패가 갈리지 않는 다른 형태의 놀이로 유연하게 전환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경쟁을 완전히 내면화하기 이전의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을, 나에게 진 친구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기 보단 함께 누리는 기쁨을 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올릭은 또한 아이들이 협력적인 게임을 할 때 더 행복해 한다고 썼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 9~10세 남자 아이들의 2/3과 모든 여자 아이들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놀이보다 모두 지지 않는 놀이를 택했다".............

아이들이 협력을 배울 수 있으며그들에게 선택권을 주면 협력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는 이러한 연구 결과는 경쟁이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는 증거로 매우 설득력 있다.

- <경쟁에 반대한다> 50페이지-

 


아직 사회의 경쟁 구조를 교육을 통해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은 아이들은
'공동체'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나와 같이 놀이를 즐기는 상대방의 패배도 나의 패배처럼 여기고, 상대방의 슬픔을 마치 내 것과도 같이 느낀다. 아직 교육이란 이름의 숱한 경쟁과 서열 확인 작업을 거치지 않은 터라, 아이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난 '공감본능'을 활용하여 놀이의 규칙을 패한 친구에게 유리하게 바꿔가면서까지 경쟁 구조의 압박을 완화시키거나 아예 승패가 없는 놀이로 전환해버린다.

이는 아이들이 즐기는 것이 승부가 아니라 놀이를 통한 친구와의 상호작용 및 그로 인한 정서적 교류, 관계 맺기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배타적인 상호 목표달성을 특징으로 하는 경쟁구조가 친구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유지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경쟁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이 특별히 순수하고 착한 존재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건 우리의 마음이 애초부터 '공동체'를 지향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공동체' 지향성 및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공감본능이란 메커니즘은 '낡은 세상의 체제(Old World System)' 하에선 철저히 한정되고 왜곡되고 위축된다. '경쟁'은 세상의 진보와 더불어 점점 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낡은 체제의 대표적인 도그마 중 하나이며,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그 외의 대안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외치듯, 자본주의의 경쟁 구조라는 하늘은 이제 인간의 마음이라는 땅에서도 철저히 내면화되어, 우리는 '경쟁력'을 갖춰 남보다 앞서고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자기계발서'의 주문들을 되뇌이며, 하루하루를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살아가는 군상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군상들이 바로 우리다.

 


2.
경쟁의 본질


우리가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경쟁을 하게 되었는가를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경쟁의 정의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필자가 생각하는 '경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경쟁은 원래 인간의 공동체 생활에서 '특정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대인 사이에서 또는 복수의 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행동양식/구조이다. 경쟁은 본래 한정된/부족한/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개인 또는 집단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구조화된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누군가 2/3을 차지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1/3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경쟁의 본질은 간단하다. 무언가가 희소하다고 여겨지면,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무언가가 한정되어 있다고 여겨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어떤 자원이 넘친다면, 도무지 그걸 두고 경쟁할 이유 따윈 없다. 태양빛을 두고 경쟁하는 바보는 없다. 그냥 나가서 햇볕을 쬐면 그만이다. 내 앞에 콸콸 흐르는 맑은 계곡물을 두고 옆 친구의 수통을 탐하는 바보는 없다. 그냥 계곡물을 떠마시면 그만이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 조건 1번은 바로 '자원의 희소성이다

그러나 유념하자. 자원이 희소하다고 해서 반드시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원의 희소성이 곧 경쟁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원이 아무리 희소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상호 협의를 통해 기준을 만들어 자원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최대한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분배'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

저녁 때가 되어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할 때, 한 어린아이가 내놓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였다그리고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어 큰 무리로 먹게 하였는데, 5천 명(여자와 어린이는 뺀 숫자)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것이다.

[출처오병이어의 기적 [五餠二魚奇蹟 ] | 네이버 백과사전



혹자는 위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고 말그대로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발현으로 해석하지만
, 필자는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가 5천명이라는 구성원들이 만족할만한 '분배의 기준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매우 희소한 자원을 '경쟁' 없이도 성공적으로 나눌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수가 실제로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알수없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본능을 극대화한 사례라면, 아마도 예수가 오병이어를 그 상황에서 가장 그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어떤 강제나 협박이 아닌 사랑의 '말씀을 통해 이뤄내 순식간에 5천 명의 개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리라


다시 '자원의 희소성'이라는 필요조건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말하는 '자원의 희소성'은 실제 상황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원의 희소하지 않은데도 희소하다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서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자원의 희소하다는 믿음이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기다.

빵이 10개가 있는데 9개를 감춰놓고 1개만 있다고 뻥을 쳐서 배고픈 사람들이 빵 하나를 놓고 피튀기게 싸우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경쟁사회인 것은 한국인이 유달리 경쟁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나눠줄 9개의 빵을 뒤로 숨겨 소수가 나눠먹고, 나머지 1개를 가지고 다수에게 던져주기 때문에 그 1개를 두고 경쟁이 그토록 치열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무한한 것이라고, 사랑은 한정되지 않고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인도 그렇게 노래하고 성인들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부모님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우리 시대에 사랑만큼 한정되고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없다. 우리들 대다수가 경험한 부모의 사랑이 그러했고 연인과의 사랑도 그러했으며 자식과의 사랑도 그러했다. 다들 사랑이 무한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이는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긍정되고 수용되는 경험을 한 적이 극히 드물다. 부모에 의해서도 형제 간에 혹은 '엄친아'와의 끊임없는 비교가 이뤄졌으며, 학교에서는 성적이라는 이름으로 평가받았고, 직장에선 연봉으로 비교당했다.

끝없는 비교 속에서 우리의 존엄은 형편없이 구겨졌으며, 우리의 가슴을 타고 흘러야 할 바다와도 같은 사랑은 이제 가끔씩 운이 좋으면 새어 나오는 수도꼭지의 물 한 방울이 되어버렸다. 사랑이라는 무한한 자원이 낡은 체제 하에선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 이제 예술가나 철학자, 성인들이나 무모하게 달려들어 캐내는 폐광이 되었다. 폐광이 된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사랑의 무한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한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희소자원이 된 사랑을 두고 모두가 경쟁에 뛰어든다. 부모의 조건적인 사랑이나마 받기 위해, 선생님의 인색한 칭찬이라도 듣고자, 동료들의 제한된 존중이나마 받으려 모두가 경쟁에 뛰어든다. 1등을 하면 그만큼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겠지란 믿음 속에 불나방처럼 잘도 뛰어든다.

그러나 그 어떤 1등도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다. 그 어떤 1등도 진정한 존엄에 이르지 못한다. 애당초 인간 정신의 존엄성이 경쟁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서 어떠한 일거리를 얻어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인간이 60억 인류를 대표하여 신과 단독자로 마주하여 신 자신이 풀수 없어 인류에게 떠 맡긴 문제의 답을 내놓는데서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경쟁의 본질이란 문제로 돌아와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경쟁은 자원이 부족한 상황 또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믿음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해선 앞서 말한 필요조건 1 외에도 한 가지 필요조건이 더 필요하다.
 


경쟁의 필요조건 1: 자원의 부족함/한정/희소성 또는 그에 대한 믿음
경쟁의 필요조건 2: 경쟁의 대안 부재에 대한 믿음



앞서 필요조건
1은 설명했으니, 이제 필요조건 2를 살펴볼 차례다. 경쟁이 성립하기 위해선 경쟁의 대안이 부재해야 한다. 아니, 경쟁의 대안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이 경쟁의 대안이 없다는 믿음이 피드백되어 경쟁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한국의 교육제도를 예로 들면 이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한국 교육 시스템의 핵심은 '경쟁을 통한 서열화'에 있으며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교육 개혁 시도는 이 본질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한 채 사교육 시장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한국 교육 정책의 입안자 및 학부모들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경쟁'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교육의 성과를 평가하고, 학습 동기를 불어넣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근거없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필자는 이것을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 근거는 이어지는 연재물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이들은 경쟁을 떠난 교육체제를 상상하지 못하며
, 상상한다 하더라도 그 상상을 현실화하려면, 교육시스템 전체를 들어내고 다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압박감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경쟁을 기초로 한 교육이 분산 에너지의 확산과 공감 능력의 심화라는 문명의 방향성을 따라 따라잡지 못하고, '근대'와 더불어 도태 될 것이란 점을 애써 외면한채 그렇게 자신들의 의사결정의 편의만을 추구하며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다.

경쟁의 필요조건 1,2 가 어우러져 경쟁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 혹은 그에 대한 믿음과 경쟁의 대안이 부재하다는 믿음이 결합되어 '경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낳는다. 이 두가지 조건이 성립되면, 혹은 이 두가지 조건을 사람들이 '믿으면' 그때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것, 피할 수 없는 것,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어 마침내 인간의 본성, 혹은 신의 섭리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그 정도 되면 아래처럼 경쟁이라는 복음의 전도사 역할을 맡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공병호씨는 교육문제 해결의 지름길은 경쟁논리 확대에 있으며,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소수인재를 위한 시스템으로 교육을 바꾸자고 주장해왔다

-한겨레 21 기사 교육부는 신자유주의 돌격대중에서-



공병호씨처럼 입만 열면, 경쟁 경쟁을 외치며 개인이 경쟁력을 갖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선전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들은 그로 인해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엔 무감각하다. 이미 자신들은 충분히 '경쟁력'을 갖췄다고 믿기 때문인걸까? 아무튼 그런 그들의 저서를 열심히 읽으며 오늘도 어제보다 나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격증에 토익에 해외연수에 여념이 없는 이들은 경쟁엔 점점 능하지만 타인의 고통엔 무감각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뒤로 하고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경쟁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3.
경쟁은 무의식이다.


우리는 부모
, 학교, 직장 등 사회 공동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의 성공이 곧 친구의 패배이고, 친구의 성공이 곧 나의 패배인 상호배타적인 목표달성의 경쟁 구조 속에 편입되어 끊임없이 비교되고, 순위매겨지고, 가치평가되고, 보상받아 왔다. 우리는 그 속에서 경쟁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경쟁은 결코 '의식적'인 것일 수 없다. 우리에게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제대로 된 선택권이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우리에게 경쟁을 거부할 권리 따윈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랑이 '희소하고', '한정되고', '조건적'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길러진 부모 밑에서 양육되면서 그렇게 위축되고 왜곡된 사랑과 관심이라도 얻기 위해 1등을 향해, 100점을 향해, 금메달을 향해, 상장을 향해 시험장/콩쿨/컨테스트/스포츠 등 경쟁의 무대로 나아갔다.

 
경쟁에서 승리를 하면 사랑과 관심, 인정이라는 정신적인 보상과 상금, 상품 등의 물질적 보상까지 받고, 패배하면 기껏해야 위로 밖에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기꺼이 경쟁의 무대로 뛰어든다. 그러나 당신은 애당초 사랑이 무한하며, 무조건적이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것이란 걸 결코 알지 못한다.

당신은 대학과 학과에 서열을 매겨놓고, 그 거대한 위계질서 속에서 아이들을 '수학능력'에 따라 분류하고 할당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개인당 1평도 안 되는 공간에 인간을 가둬놓고 온갖 지식을 쑤셔넣는 것을 '교육' 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친구들과의 끝없는 경쟁을 강요 받았다. 선생들이 매기는 등수에 지친 아이들은 성적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별도의 위계질서들을 싸움실력, 언변, 미모, 운동 실력 등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보지만, 결국 고3이 되면 '수능'이라는 거대한 경쟁의 물결에 휩싸여 버린다. 대안 교육이란 이름이 아직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결국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모든 교육이 '대학'으로 수렴된다.



제도권 교육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더라도 혹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대입이라는 경쟁을 통과했다손 치더라도, 그걸로 경쟁은 끝이 아니다. 우리는 결코 경쟁을 벗어날 수 없다. 이젠 취업이라는 경쟁의 무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속에서 당신은 계속해서 자신이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임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임을, 나아가 조직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입중해야 한다.

물론 취업을 해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돈을 모아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나면 이제 정말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돌입해야 한다. OECD 국가에서도 손꼽히는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왼손엔엔 생존의 바이블인 자기계발서, 오른손엔 24시간 업무도구인 스마트폰을 들고 출근길에 올라 직장이라는 경쟁 무대로 향한다.
 


이런 우리에게 경쟁은 차라리 '무의식'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축을 타고 움직이며 일한다. 구조론 마음이론에서, 정신은 외부환경에서 일거리를 얻어오면서 존엄을 지향하며, 의식은 일거리를 내 마음 안으로 들여와 자유를 통해 자아의 영역을 확보한다. 의도는 일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기 위해 포지션을 선점하려 들며, 생각은 일상의 활동을 통해 실제로 일을 행하고, 감정은 일의 결과를 점검하고 평가하여 우리에게 일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실시간으로 피드백해준다.

경쟁은 이러한 인간 마음의 구조에서의 상부구조 정신-의식-의도를 왜곡시킨다.

정신은 마음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외부환경에서 에너지를 조달하는데, 경쟁은 나와 외부환경 사이에 불필요한 경계선을 그어 에너지를 제한한다. 경쟁은 불필요하게 외부환경과 대립하면서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외부환경을 적대시하면서 스스로 에너지 공급원을 차단해버린다. 쉽게 예를 들자면, 경쟁에서 1등을 하기 위해 친구들과 자신의 학습 방법과 이해한 내용을 공유하지 않고 혼자서만 열심히 공부하지만, 결국 스터디 그룹을 이뤄 서로의 학습 방법과 내용을 공유한 아이들에게 뒤쳐지고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인간의 마음에서 정신은 어떤 외부의 상황과 최초에 맞닥뜨렸을 때 작동하여 한 번 세팅되면 그 다음부턴 비슷한 상황에선 반복적으로 써먹게 된다. 경쟁에 대한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부모에 의해 경쟁 구조를 접하여 이를 정신을 통해 들여올 땐 의식적으로 경쟁 구조를 점검할 수가 없다. 아이에겐 부모가 강요한 경쟁 구조가 부당하다는 느낌은 있으나 이를 표현할 방법이 거의 없으며, 설령 표현한다 할지라도 부모는 이를 아이의 어리광으로 알고 무시하기 일수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최초 경쟁구조 속에 강제로 편입될 때 이에 대해 울음이나 짜증, 분노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는 아이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여 혼내거나 무시했을 때, 아이가 보이는 반응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경쟁 구조를 당연시 여기는 부모들은 이러한 아이의 반응을 산뜻하게 무시하고,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으로 계속해서 아이에게 경쟁 구조를 강요하며, 이것이 부모에게 자신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이들에게 한 번 각인되면, 이후 아이의 의식-의도-생각-감정은 한 번 세팅된 경쟁 구조를 따라 작동하게 된다.

최초 부모가 외부 환경의 경쟁 구조를 아이에게 끌어와 정신에 세팅시켜 놓으면 이후의 의식-의도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정신: 부모에 의한 경쟁 구조의 내면화. 이를 아이는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아직 아이는 경쟁 구조에 대한 감정적인 거부의사(싫어!)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 경쟁 구조 자체를 의식하고 이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히진 못한다. 인지능력, 특히 언어적 표현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들도 자신에게 강요된 경쟁 구조가 부당하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말을 조리있게 못할 뿐이다.
 
 

의식: 경쟁적인 자아 혹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자아. 한 번 경쟁 구조가 정신에 세팅되면 이후에 아이의 정신이 물어오는 일거리는 주로 경쟁적인 활동들이 된다. 정신이 무언가 서열이 매겨지고, 순위가 매겨지고, 점수가 매겨져 타인과 비교되는 활동들을 물어오면, 이를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이는 성공 또는 실패를 겪게 되며, 아이의 능력과 주변의 지지 수준에 따라 겪는 성공 및 실패의 빈도수가 달라진다.

성공을 보다 많이 겪은 아이들은 경쟁적인 자아가 되어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로부터 오는 긴장과 보상을 즐기게 되지만, 실패를 보다 많이 겪은 아이는 경쟁을 두려워 하고, 그로부터 오는 긴장과 보상 받지 못함을 두려워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경쟁 구조에 아이가 노출된 이후 아이의 정신이 협력적인 외부 환경과 접촉하지 못하면, 아이의 협력적인 자아 역시 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의식은 정신이 물어온 일거리에 유기체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의사결정의 축이며, 이 축은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타격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가 협력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외부의 교육 환경이나 양육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아이가 향후 타인과 원활하게 협력하며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의도: 의식에서 세팅된 자아에 따라 의도에선 자신의 포지션(역할)을 정하게 된다. 외부 환경의 경쟁 구조에 이미 세팅된 승자/패자 구도에 따라 자아는 경쟁 경험을 반복적으로 쌓으면서 그 빈도에 따라 자신을 승자 혹은 패자로 설정하게 된다. 한 번 자아가 승자 혹은 패자로 설정되면, 승자는 계속해서 이겨서 공동체 내에서 보다 높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품게 되며, 패자는 자동적으로 승자보다 낮은 지위를 점유하게 되며, 패자 역할에 따르게 된다.

경쟁 구조에 주로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의도 수준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정할 때 타인과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 우위에 서려하며 이는 공동체 내에서 끊임없이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쟁적 의도는 개인에게 '비교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무의식적인 압력으로 나타나며, 이는 경쟁을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 대다수가 앓고있는 일종의 신경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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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선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의 경우를 한 번 떠올려보자. 우리는 누구나 쓸데없는 호승심에 타인과 갈등을 빚은 경험을 갖고 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인 의도에 조종당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이기고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려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예 자신의 캐릭터를 '패자'로 설정하여 경쟁을 회피하고 공동체 내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자동적으로 승자의 밑으로 고정시켜 놓고 더 이상 포지션 이동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는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경쟁의 대안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사회적으론 저소득층 및 빈곤층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그 유명한 '학습된 무기력이란 개념은 바로 이러한 의도 차원의 '패자' 설정을 의미한다
. 

이처럼 경쟁은 마음의 상부구조인 정신-의식-의도를 거쳐가며 마음 깊숙히 자각되지 않은 채 '무의식'으로 남게 된다. 연인이랑 가볍게 시작한 게임이 어느새 상대를 이기기 위한 작은 전쟁으로 변한 경우, 나도 모르게 강사의 안내에 따라 타인과 박수 큰소리로 치기 경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 자신도 모르게 내 차를 앞서 나간 이를 추월하려 무리해서 과속을 하는 경우, 우리는 바로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경쟁이란 무의식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 

바로 이 '무의식'이 문제다. 탐진치 삼독의 뿌리가 무명, 밝지못함, 인간의 의식하지 못함에서 비롯되듯, 경쟁이라는 문제의 근원은 사실 '무의식'에 있다. 어린 시절, 아직 어른들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고 자신의 의사를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의 양육, 공동체의 교육에 의해 경쟁을 주입받은 것이 문제다. 
 

비극은, 우리가 이 경쟁의 대안 없이 '경쟁 위주로' 주입받았다는 점에 있다. 경쟁 외에도 외부환경에서 일거리를 내 마음 안으로 들여와 일하는 대상과 관계를 긴밀해 맺고 일을 행해 그 결과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그러한 방법이 실천되는 외부 환경에도 제대로 노출되지 못했다
.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우리에게 깊은 무의식으로 남아버렸다. 부모에게서 아이에게로, 다시 그 아이가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로 넘겨주는 거대한 무지
. 그 대를 이은 무지로부터 마침내 현대판 신화가 하나 탄생했다. 

바로, 경쟁이라는 신화이다
.
.
.

P.S. 다음편은 "경쟁은 신화다"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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